“말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근사한 일이야.” * 기본 설정. 이름: 카스파르 다비트 베레트 (Caspar David Berett). - 사적인 자리에서는 ‘다비트’ 보다는 ‘카스파르’ 라고 불러 주는 걸 좋아한다. 생년월일: 1910년 1월 18일. 젠더/성적 지향: 시스젠더 (법적 성별 남성), 그레이로맨틱 에이섹슈얼. - 자신이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으며 그런 일들에 관심이 없음을 깨달은 계기는 학교 다닐 때 동급생들이 돌려 보던 야한 그림들과 사진들을 봤는데 정말 아무 느낌도 안 들어서이다 (오히려 약간 불쾌했다고 한다). 어땠냐는 친구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했더니 친구가 굉장히 놀랐다고 한다. 그러나 정체화를 하지는 못한다. 평생 자신이 그냥 독신주의자라 생각하면서 섹스에 관심이 없는 건 그냥 그런..
이런 젠장! ‘나른한 탐닉’ 이라는 표현을 쓰자마자 바로 몸이 반응하는구만. 그 진득한 아편 연기가 몸 안에 스며드는 것 같아. 이건 한낱 비유가 아니지. 실핏줄이 우리 몸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건 참 근사한 일이라고.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느다란 수천 수만 개의 실핏줄을 타고 아편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공연장에 도착해. 그 핏줄 하나 하나에 뇌가 달린 느낌이랄까? 수만 개의 매혹이 동시에 탄성을 질러 대지. 지구상의 모든 악기가 동시에 내 몸에서 연주를 시작해. 그러다 한꺼번에 ‘포르테’! 세게 세게 더 크고 세게 끝까지 가 버리는 거야. 그 날의 장담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소. 우선 아편이 한양을 비롯한 내륙으로 스며들 것이라는 주장은 옳았다오. 지금 한양을 보시오. 나 같은 아편쟁이들이 몇만..
그 놈의 ‘본성 대 양육’ 은 정말 끝도 없이 나온다. 이 분야를 공부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주제라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한 거 같다. 그리고 어느 하나만 강조하면 안 된다고 결론 났다면서 왜 ‘Nature versus Nurture’ 인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용어 이야기를 하자면 이해 안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를 들어 뉴런의 신호 전달에서는 활동 전위가 ‘실무율’ 을 따른다. 자극이 한 번 역치를 넘기면 그 과정이 끝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영어로 ‘All-or-none’ 이다. 그리고 두 가지 이상의 변인을 독립적으로 바꾸어 가며 예측 변인의 조합을 만드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이걸 ‘중다 요인 연구’ 라고 하는데 여기서 ‘중다’ 는 영어로 ‘multi’ 이다. 또 ..
내 입장에서 ‘낫는다’ 라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과 같은 사람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니 아무 상관도 없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 김보영, . 이 작품의 서술자는 다른 행성에 살며 주기적으로 의식을 잃는 병을 앓고 있다. 우리가 보기에는 ‘잠드는’ 것이며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만 작중의 표현이 그러하다. ‘다른 행성’ 에서 눈치 챘겠지만 이 작품은 SF이다. 을 읽을 때 그랬듯 이 작품에서도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 라는 주제를 읽었다. 이 행성의 학자들은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라는 단 한 문장만 가지고 지구가 어떤 곳인지 추론해 내고자 노력한다. 서술자는 자신이 병으로 인해 남들과 ..
그런데 왜 내가 겪은 일들을 재구성할 생각은 않고 이렇듯 사변을 늘어놓고 있는가? 아마도 엊그제 내가 무엇을 했는가와 아울러 나의 내면이 어떠한지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리라. 나에게 내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영혼이란 그저 사람이 행하는 바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증오하고 이렇듯 원한을 품고 있다면 그건 하나의 내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런 깨달음을 철학자는 어떤 식으로 설파했던가? ‘오디 에르고 숨 (나는 증오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움베르토 에코, . 이 문단 바로 직전까지 시모네 시모니니는 온갖 것들에 대한 자신의 증오심과 혐오감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방식이 바로 증오임을 이 문단으로 확정해 버린다..
- 이 글에는 가정 폭력 및 학대와 관련된 언급이 있습니다. “나는 건반을 사랑합니다. 그 위에서만은 내 손을 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기본 설정. 이름: 로렌츠 파울 에브너 (Lorenz Paul Ebner). - 공식 문서에 서명을 할 때도 ‘파울’ 은 절대 쓰지 않는다. 또 혹시라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에게는 당장이라도 죽여 버릴 기세로 화를 낸다. 애초에 통성명을 할 때부터 ‘그냥 로렌츠라고 부르십시오’ 라고 하기 때문에 알 길은 없지만. 생년월일: 1788년 2월 26일. 젠더/성적 지향: 시스젠더 (법적 성별 남성), 헤테로로맨틱 데미섹슈얼. - 어쩌면 ‘사랑’ 이라는 감정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언어: 오스트리아 독일어 (모국어), 이탈리아어 (어색하지는 않음). - ..
“오늘의 내가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듯이 내일의 나 또한 그러하기를.” * 기본 설정. 이름: 유니스 도메니카 크로체타 (Eunice Domenica Crocetta). - ‘유니스’ 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 특히 미들네임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많이 불편해 한다. 예외적으로 오빠가 미들네임으로 부르는 건 괜찮다고 한다. 생년월일: 1936년 12월 16일. 젠더 및 성적 지향: 시스젠더 (법적 성별 여성), 그레이로맨틱 그레이섹슈얼. - 본인은 평생 정체화하지 못하지만 어떤 글이나 이론을 처음 접할 때와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날 때의 마음이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 언어: 영국식 영어 (모국어), 프랑스어 (크게 어색하지는 않음), 독일어 (독해 위주). - 영국식 영어 중에서도 에스추어리를 사용한다...
달은 물론이거니와 별도 하나 안 보이는 새까만 밤이었다. 그러나 서재 안에는 촛불이 밝았다. 40대 중반 가량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창 밖의 어둠과 분간이 안 되는 색인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활자 새겨진 종이를 향해 고정하고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의 금빛 머리카락은 촛불 빛에 더 환하게 빛났다. 잠시 쉬는 중인지 그의 파란색 눈동자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턱수염 역시 강렬한 대비를 이루었다. 한 사람은 ‘웅장하다’ 라는 말의 뜻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로 덥수룩했지만 다른 사람은 차분하고 단정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이토록 정반대인 두 사람이 같은 주제에 이렇게나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 광경을 ..
* 케이네스 박사님의 전자 부친이자 저의 절친한 트친님이며 이 시대의 참된 과학도인 로노님 (@RN_virtu) 께 이 글을 바칩니다. 여태 타임라인에 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1960년대 중반의 런던 한복판에는 다 쓰러져 가는 2층 건물이 하나 있었다. 하도 낡은 데다 먼지와 물때에 절어 있어 어느 누구도 그 건물이 누구 것인지 뭐 하는 곳인지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 안 했다. 실은 이 곳이 출판사라고 귀띔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랬다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 출판사는 이제 막 문을 열었고 직원이라고 해 봤자 사장과 편집장, 두 사람 뿐이었다. 사장은 성이 ‘파이퍼 (Piper)’ 였지만 파이프 담배는 커녕 그냥 담배도 한 번 건드려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
유니스 도메니카 크로체타의 평소 생각하는 바가 어떠한지는 어느 정도 그의 몸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염색 한 번 안 하고도 비현실적이리 만치 붉었고 뭔가를 잡고 들고 밀고 당기는 것 이상의 세세한 조절이 필요한 모든 일들에 왼손을 써 왔다. 그렇다. 그는 확고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프랑스 대혁명이 한창이던 때 붉은 프리기아 모자와 자코뱅 파 의원들의 자리에서부터 생긴 제법 된 고정 관념을 온 몸으로 드러내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냥 보기에는 지극히 차분하며 착 가라앉아 있는 20대 후반 여성이었다. 친구든 연인이든 애인이든 누군가와 깊이 어울리는 일도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인지 여가라고 해도 책을 읽고 어쩌다 글을 끼적이는 정도가 전부였다. 요리 실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끼니를 챙기는 이상의 무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