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밤이 오면 달빛이 은은하게 거리를 비춘다는 것을 모른다. 하늘 가득 별이 빛나고 그 별이 하루에 한 번씩 천구를 운행한다는 사실 또한 모른다. 달의 모양이 주기적으로 차고 이지러지며 오늘과 같은 보름 밤에는 그 창백한 빛에 거리가 은빛으로 빛난다는 것을 모른다. 그에게 밤이란 단지 소리가 가라앉는 시간이며 습기가 차고 기온이 낮아지는 시간이며 공기가 무거워지는 시간이며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시간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집이 그림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의 집 벽 가득 그림을 그렸으며 붉은 노을과 짙푸른 밤하늘을 그려 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내가 단지 냄새를 묻히며 영역 표시를 하고 있다고만 생각한다. 내가 현관 문에 그의 초상을 그렸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
악단의 마차 세 대 모두 양면에 흰색 페인트로 ‘유랑 악단’ 이라고 적혀 있는데, 선두 마차에는 한 줄이 더 적혀 있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9월의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유랑 악단은 공항을 떠났다. 5주 간 공항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고 마차를 수리하고 저녁마다 셰익스피어 극을 공연하거나 연주회를 열던 유랑 악단이 떠난 뒤에도 음악과 연극의 여운은 오래도록 남았다. 그 날 오후 가렛은 밭에서 바닥을 쓸면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을 흥얼거렸고 돌로레스는 중앙 홀 바닥을 쓸면서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읊조렸으며 어린 아이들은 나뭇가지로 칼 싸움을 했다. -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 사실 아서 파트와 지반 파트는 특별한 인상이 남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아서 파트는 재미가 없었다). 클라크..
2018년 12월 8일 19시, 대학로 JTN 아트 홀 1관. 루트비히: 이주광. 청년: 강찬. 마리: 김려원. 발터 외: 함희수. 피아니스트: 강수영. * 그렇다. 추천 못 하겠다고 하더니 결국 또 보러 갔다. 생각 외로 마음에 들기는 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를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는 점도 그렇고 (오면 어떻게 하냐고 하면서도 진짜로 올 거라고는 절대 생각 안 했다!), 마리에 대해서도 그렇고. 보다시피 청년 역 배우님만 다른데, 지난번의 청년과는 굉장히 딴판이라 좀 놀랐다. 마리를 처음 만났을 때 가끔 존댓말 하는 게 다였으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지난번 청년 루트비히는 원래 좀 예민하고 까칠한 사람이긴 하지만 상황이 안 좋아서 더더욱 말이 곱게 안 나오는 느낌이었으나..
2018년 11월 21일 16시, 대학로 아트원 시어터 1관. K: 김종구. 김의신: 김도현. 윤명렬: 이용규. 입소문이 나를 극장까지 이끈 극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 분명히 별 이야기가 없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갑자기 폭발적으로 소문이 돌아 버렸고 놀라우리 만치 빠르게 매진이 되어 버렸으며 늦게 예매하는 자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래서 K는 내가 정말 보고 싶었던 배우님이 아니다. 의신이 필기만 오른손으로 하는 왼손잡이 캐릭터였다! 초반에 기본적인 검사들을 하는데 청진이나 채혈을 모두 왼손으로 진행했다. 이것도 이 날 배우님의 의신만 그런 것일 테지만 2층 꼭대기 자리에서 봤는데도 너무 잘 보였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아닌 존재’ 인 K와 ‘보편적인 인간 상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
어둑새벽 눈을 뜨자마자 찾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담배 또 하나는 커피.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웠던 시절이 절반, 담배를 피우며 커피를 마셨던 시절이 절반, 그렇게 흘러 갔다고, 감히 인생을 요약해 버리는 여자의 속삭임이다. 외국어 교본이 사방 벽에 가득 꽂힌 서재로부터 멀리 달아났다. 머물러 썩어 가느니 붙잡혀 치도곤을 당하더라도 불행을 거스르고 나라 법을 거슬러 오르고 싶었다. 천하를 덮는 조롱이 등장한다고 해도 나는 그 조롱 너머로 날갯짓 하리라. 하루 하루를 버티기 위해 잔 속임수를 부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중략) 그 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내 목소리와 말투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빤한 거짓말인데도 그들은 내 손을 붙잡고 눈물 흘리거나 손뼉 치며 좋아했다. 나 역시 그 모습이 즐..
나는 누구인가, 조선에서 태어난 기생, 의술을 익히고 춤을 배운 궁중 무희. (중략) 아무리 불어를 잘 해도 그네들의 사상과 시문에 깊이 동감해도 나는 프랑스인이 될 수 없지. 나는 누구인가, 정녕 누구란 말인가. 내 영혼의 얼굴은 조선인일까, 프랑스인일까,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괴물일까. - 김탁환, 2권. 이 책은 다 읽었지만 2권만 샀다. 나머지는 앞으로도 살 생각이 없다. 우선 리심이 1인칭 화자로서 직접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외국 생활을 하는 2권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조선에서는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3권의 내용이 읽는 내 입장에서도 그토록 괴로웠겠지. 요즘의 경향으로는 이 책에서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을 느끼고 불편해 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
* 다른 극에서 본 적 있는 배우님은 뒤에 ‘*’ 표시를 했습니다. 2018년 11월 17일 15시, 안산 문화 예술의 전당 달맞이 극장. 빈센트 반 고흐: 김경수 (* 싱클레어 고든 역). 테오 반 고흐: 박유덕 (* 타이틀 롤). 왜 예매를 했는지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거 보니 아무래도 표 값이 너무 싸서 눈이 돌아갔던 모양이다. 그리고 결과적인 이야기지만 과에서 학술제를 했는데 그게 바로 이 공연 전날이었다. 요컨대 나의 11월 관극 스케줄은 대체로 뭔가를 끝낸 직후이게 된 셈이다... 좋긴 했는데 참 피곤했다. 밖에 나갈 일이 없는 날에는 아예 아무것도 안 하다시피 할 정도다. 우선 무대가 새하얗다. 정말이다. 그냥 새하얗다. 이 새하얀 무대에 그 때 그 때 고흐의 그림들이나 적절한 배경들을 빔 ..
2018년 11월 29일 20시, 대학로 JTN 아트 홀 1관.루트비히: 이주광. 청년: 김현진. 마리: 김려원. 발터 외: 함희수. 피아니스트: 강수영 (* 의 피아니스트). 나는 이 극이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한 달 넘게 내용이 어떨지 예상하고 ‘어떻게 감히 그럴 수가 있어? 대체 이 사람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하는 것을 반복하며 널브러져 있었다. 특히 나한테는 ‘무엇을’ 보다 ‘어떻게’ 가 더 중요한 이야기였으니까 ( 이상으로!). 그러다가 어느 잠 안 오던 새벽 피곤에 전 채로 프리뷰 회차 예매를 해 버렸다. 이 글은 그 프리뷰 회차의 후기다. 시놉시스와 설명만 들으면 대단히 혼란스러운 멀티 캐릭터들이 난무한다. 간단히 말해 보자면... 배우 기준으로 장년 루트비히가 초반에는 자기 ..
* 다른 극에서 본 적 있는 배우님은 뒤에 ‘*’ 표시를 했습니다. 2018년 10월 21일 14시, 백암 아트 홀. 제루샤 애버트: 유리아 (* 안나 역). 저비스 펜들턴: 강동호. * 원작은 진 웹스터의 동명 소설. 예매 사이트의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아서 한참을 헤맸고 동네 ATM에서 무 통장 입금이 잘 안 되는 바람에 ‘취소 후 재 예매’ 를 세 번이나 했다. 그래서 이 극의 예매가 4일이나 먼저 열렸는데도 (10월 12일) 와 예매 날짜가 같다. 원작을 알고 보는 경우에는 정말 어쩔 수 없이 비교를 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정말 어릴 때 읽었던 작품이다 보니 대략의 흐름만 기억이 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정도 재해석은 매우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저비스는 제루샤가 누구든 어떻든 상관 없으며 재..
실험 상황과 조건이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에 대해 배웠다. 오늘 배운 게 발달 심리학에서 영아의 인지 발달이었는데, 피아제의 이론 중 대상 영속성 (object permanence) 부분이 틀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알아냈는가 하면 원래의 ‘찾기 과제’ 가 아니라 ‘기대 위반 (violation of expectation)’ 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단다. 영아들이 대상 영속성을 알고는 있어도 찾기 과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정도의 인지 발달을 하지 못 해서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면서 시작한 연구였다고 한다. 교재에 해당 연구가 인용되어 있는 부분을 보니 그렇게 오래 된 것이 아니다 (난 내가 태어난 뒤의 연구들은 오래 되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피아제 이론을 배우는 다른 분야에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