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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내가 겪은 일들을 재구성할 생각은 않고 이렇듯 사변을 늘어놓고 있는가? 아마도 엊그제 내가 무엇을 했는가와 아울러 나의 내면이 어떠한지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리라. 나에게 내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영혼이란 그저 사람이 행하는 바로 드러나는 것일 뿐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증오하고 이렇듯 원한을 품고 있다면 그건 하나의 내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이런 깨달음을 철학자는 어떤 식으로 설파했던가? ‘오디 에르고 숨 (나는 증오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움베르토 에코, <프라하의 묘지>.

 

이 문단 바로 직전까지 시모네 시모니니는 온갖 것들에 대한 자신의 증오심과 혐오감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 방식이 바로 증오임을 이 문단으로 확정해 버린다. 하기야 그는 문서 위조로 먹고 살며 자신의 목적과 이익과 즐거움만을 따지고 그것을 위해 살인도 불사하는 악인이니까. 그는 오로지 거짓과 증오와 (앞의 둘에 비해 매우 뜬금없지만) 미식으로만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는 그 방식으로는 결코 스스로를 채울 수 없었다. 거짓과 증오로는 뭔가를 부술 뿐 아무것도 만들 수 없고 맛있는 음식들도 먹을 때야 즐겁겠지만 소화가 되면 그 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최후는 고통스럽고 비참하지만 그의 악행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그 악행들이 불러 온 결과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 하루 늦은 글이다. 원래 에코의 2주기를 챙기기 위해 썼으므로 어제 올렸어야 했다... 내가 어제는 바빴으니 어쩔 수 없지 뭐.

- 시모니니가 악인이고 온갖 혐오를 일삼기 때문에 권하기 참 껄끄러운 책이다. 문제는 이 책이 정말 재미있다는 점이다. 하다못해 그의 미식 취미의 일환으로 틈틈이 나오는 음식들과 그 조리법들과 묘사들만 따라가며 읽어도 재미있다. 난 실제로 책 속에 나오는 음식 묘사들을 읽어 주는 트위터 계정에 이 책을 추천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길티 플레저의 극치다.

- 중학교 3학년 때 출간되자마자 읽었는데 단 20페이지 만에 시모니니가 악당이라는 결론을 내려 버렸다. 이유는 정말 터무니 없다. 그가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두고 상스럽다고 했기 때문이다


2018년 2월 20일,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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