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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어떤 고용 (2018. 06)

루나 in Learning 2018. 6. 20. 23:19

* 케이네스 박사님의 전자 부친이자 저의 절친한 트친님이며 이 시대의 참된 과학도인 로노님 (@RN_virtu) 께 이 글을 바칩니다. 여태 타임라인에 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1960년대 중반의 런던 한복판에는 다 쓰러져 가는 2층 건물이 하나 있었다. 하도 낡은 데다 먼지와 물때에 절어 있어 어느 누구도 그 건물이 누구 것인지 뭐 하는 곳인지 관심을 가질 생각조차 안 했다. 실은 이 곳이 출판사라고 귀띔을 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랬다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 출판사는 이제 막 문을 열었고 직원이라고 해 봤자 사장과 편집장, 두 사람 뿐이었다. 사장은 성이 파이퍼 (Piper)’ 였지만 파이프 담배는 커녕 그냥 담배도 한 번 건드려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편집장의 성은 크로체타 (Crocetta)[각주:1]였지만 그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불가지론자였다.

그 날도 사장은 지하에 있는 인쇄기를 손보고 있었다. 그랬기에 편집장은 1층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 일을 하고 있었다. 왼손에 만년필을 들고 오른손으로 종이를 지그시 누른 채였다. 속으로는 슬슬 직원 채용을 해야 할 텐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크로체타 편집장이 이것을 걱정해야 했던 것은 지극히 간단한 이유 때문이었다. 파이퍼 사장을 그냥 뒀다가는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 호그와트 시절 그냥 그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핀도르 사감 선생에게 불려 간 일이 도대체 몇 번이었던가? 그래서 이제는 거의 조작적 조건화[각주:2]가 되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물론 사감 선생이 조건화를 의도한 대상은 그가 아니었겠지만.

게다가 보통의 회사들이 노동자를 많이 고용하는 이유는 이윤을 더 많이 창출하기 위함이지만 이 출판사의 경우는 아니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밀리 파이퍼 사장이 일을 덜 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를 포함해 미래에 고용될지 모를 노동자들이 상대적 과잉 인구[각주:3]가 되지 않는 길이었다.

아무튼 실내는 조용했다. 만년필 끼적이는 소리와 타자기 치는 소리가 번갈아 울려 퍼지는 것을 제외하면 정말 조용했다. , 가끔 지하에서 인쇄기 돌아가는 소리가 끼익, 끼익, 끼익하기는 했다. 그러나 유니스 도메니카 크로체타 편집장의 착 가라앉은 고요함에 그 소리는 잦아들어 별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철커덕하고 문 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유니스의 교감 신경계[각주:4]가 한껏 날뛰기 시작했다. 입이 짝짝 마르는 느낌이 들고 속이 묘하게 불편해졌다. ‘뭐지? 누구지?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며칠 내내 아무 일도 없이 잘 지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의 왼손이 절로 가방 안으로 - 그리고 그 안에 든 지팡이로 - 향했다. 그것을 쥔 채 유니스는 어찌어찌 침착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정장 차림을 한 키 큰 남자가 들어왔다. 나이는 대략 4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카락은 물기인지 기름기인지가 철철 흘러 넘쳤다. 안경은 얇은 금속 테이고 눈동자는 파란색이었는데, 제법 깊이가 있는 듯 싶었다. 요컨대 꽤 차가운 인상이었다. ‘공무원이나 그 비슷한 건가? 아니면 경제학 교재에서 봤던가?’ 유니스가 멋대로 상상을 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노동자를 구한다고 들어서 찾아왔습니다만...”

크로체타 편집장에게는 거의 관념적으로만 존재하고 소리 내 말할 수는 없는 그런 용인 발음[각주:5]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많이 부러웠다. 대학 시절 발표나 토론을 할 때마다 발음에 신경 쓰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나서 더더욱.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나름 열심히 짜 놓은 보안이 뚫린 것이다. ‘제기랄, 빌어 처먹을!’ 부터 시작해 평소에는 생각도 잘 안 하던 그런 말들이 막 떠올랐다.

이왕 잡혀 갈 거 오블리비아테[각주:6]나 한 번 쓰고 가자.’

그리하여 유니스는 왼손에 지팡이를 꽉 쥐고 자기 앞에 선 그 남자를 겨누며 외쳤다.

... 당신 뭐야?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

그 때 다급하게 계단을 올라오는 걸음이 아래쪽에서부터 들려 왔다. 마침내 올라온 걸음 소리의 주인은 키가 크고 날카롭게 똑 부러지는 듯 한 얼굴을 한 사람이었다. 어릴 때는 똘똘해 보인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밀리 파이퍼...”

유니스, 미안해! 내가 말을 해 놨어야 했는데 까먹어 버렸지 뭐야!”

그러나 크로체타 편집장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

나 가끔 이런 생각도 들어. 혹시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한테 오블리비아테를 써 버려서 네 기억력이 늘 그 모양인가 말이야. 너 도대체 제대로 기억하는 게 뭐니? 있기는 하니?”

밀리 파이퍼가 대답을 못 하고 있던 틈에 남자가 마저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내 이름은 에드워드 윌리엄 테오도르 케이네스라고 합니다. 노동자를 구한다고 해서 찾아왔고 밀리 파이퍼 사장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계약을 한 것이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크로체타 편집장의 짜증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갔다.

밀리 파이퍼, 계약서 썼지? 보여 줘 봐.”

없어, 구두 계약이야.”

“...”

다른 거라면 10만 파운드가 든 돈 가방이 있었지.”

“... 너 도대체 저 분이 그걸 먹고 튀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한 번 봐봐, 저렇게까지 신뢰도[각주:7]와 타당도[각주:8]가 흘러 넘치는 얼굴이 어디 또 있을 거 같아?”

그 개념 그렇게 쓰는 거 아니거든?!”

이 쯤 되니 케이네스 박사는 약간 무안해지기까지 했다. 초면인 사람들이니 막 말을 걸기도 좀 그랬다. 그러니 그냥 이 상황이 제발 빨리 끝나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유니스가 약 통에서 알약을 하나 꺼내 물과 같이 삼켰다. 그러고는 하고 한 차례 한숨을 쉬었다. 이내 그는 다시 원래의 침착한 목소리로 돌아가 케이네스 박사를 보며 말했다.

구두 계약은 법적 효력 없는 거 알죠? 노동 계약서 쓸 거에요, 그 김에 이력 확인도 하고. 그러니까 같이 대기실로 가죠.”

그리고 그는 대기실 문을 열었다. 밀리에게는 이따가 나 좀 보자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편집장은 우선 케이네스의 이력을 확인했다. 그건 꽤 쉬운 일이었다. 그가 가져온 이력서를 보고 항목 하나 하나를 직접 물어 보는 식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최종 학력이...”

런던 정치 경제 대학교 정치학 및 경제학 박사입니다.”

이거 반갑네요, 내가 그 학교 사회학 학사거든요 - 졸업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는 무슨 노동을 했죠?”

파리 북 역 청소 노동자였습니다.”

꽤 오래 하셨네요. 어쩌다가 거기까지 갔다 온...”

그 때 케이네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차싶어 편집장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 , 곤란한 이야기인가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통계 자료 처리할 줄 아시나요? 솔직하게 이야기 하시면 됩니다.”

꽤 오래 전에 배워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인 것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내가 사실 배워 놓고도 영 자신이 없거든요.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동 계약서 양식이 나타났다. 이제 두 사람은 그 항목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검토해 나가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주문을 할 때 이것저것 요구 사항을 덧붙이는 미식가들만큼이나 시간을 들였다.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한 사람은 얼마 전까지 파리의 기차역에서 청소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얼마 전까지 대학 근처 카페에서 서빙을 했으니까. 그런 처지가 되어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분명 존재하는 법이다.

“... 그리고 여기 보면 연봉 협상이 매년 12월 마지막 주에 있을 거라고 했는데, 그럼 매년 연봉이 오르는 겁니까?”

케이네스가 조금이라도 확실치 않은 부분에 대해 질문을 하면 크로체타 편집장은 차분하게 답했다.

출판사 사정이 정말 많이 나쁘지만 않다면 매년 오를 거에요.”

“‘정말 많이 나쁘다라는 개념의 조작적 정의[각주:9]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유니스는 난처했는지 왼손에 든 만년필의 꼭지를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 그가 이렇게 답할 때까지.

이런 맙소사, 좋은 지적 감사해요. 흐음, 그러니까...”

대략 이런 식으로 한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케이네스가 오른손에 만년필을 들고 서명을 했다. 그렇게 케이네스 박사는 도도 출판사의 객원 학자가 되었고 편집장은 그의 상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 출판사에 속한 사람들의 이름에 있는 부조화에 또 한 가지 차원이 생겨났다. 케이네스 박사의 이름은 ‘Keynes’ 라고 써야 한다. 그러나 박사는 죽었다 깨 나도 그 죽은 경제학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 후기.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글은 어쩌다 보니 제 타임라인의 아이돌이 되어 버린 유니스와 그의 직장 동료 겸 학문적 동료로 설정되어 있는 케이네스 박사의 첫 만남 이야기입니다. 원래는 사건을 하나 정도 더 쓸 생각이었는데, 박사님과 편집장님의 전공에 대해 제가 아는 게 별로 없는 관계로 그냥 짧게 쳐 냈습니다.

눈치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대명사 그녀를 쓰지 않았고 손이 나올 때마다 그 방향을 명시했습니다. 유니스가 왼손잡이 여성이라는 점을 어필하려는 의도였는데, 아마 앞으로도 어느 시대 어느 공간이든 그녀는 안 쓰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싶네요.

역시 시험 기간은 위대해요. 시험 기간만 되면 뭔가 쓸 수 있을 거 같고 정말로 하나는 쓰거든요. 이제... 방학이 되었네요. 정말로 훌륭하게 농땡이를 부려 보고 싶지만 두 달 동안 뭐 대단히 많은 걸 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냥 다음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가능하다면 말이죠.

 

2018620, 루나.

 

- 저는 한국어를 기준으로 했을 때 상대를 높이되 자신을 낮추지 않는 말투 (구체적으로는 1인칭이 인 합쇼체 내지 해요체) 를 참 좋아합니다. 대화문을 쓸 때는 어째 익숙하지가 않지만요.

- 유니스가 중간에 먹은 알약은 위장약과 두통약 중에서 고민하다가 그냥 뭐라고 정하지 않는 쪽을 택했습니다.

- 마지막의 그 죽은 경제학자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맞습니다.

 

각주 제외 공백 포함 5031.

본문 공백 포함 4289.  

  1. 이탈리아어로 ‘작은 십자가’ 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2. Operant conditioning. 심리학에서 말하는 학습의 형태 중 하나로 어떤 행동과 그로 인한 결과를 연합하는 조건화를 말한다. [본문으로]
  3. Relative surplus population. 노동 능력이 있으나 노동력을 팔 수 없어 실업 상태인 인구를 말한다. [본문으로]
  4. Sympathetic nervous system. 자율 신경계의 한 종류이다. 이것이 흥분하면 동공 확대. 타액 분비 억제, 심박 수 증가, 혈압 상승, 소화 작용 억제 등이 일어나 위험한 상태에 대처할 수 있는 ‘긴장 상태’ 가 된다. [본문으로]
  5. Received pronounciation (또는 Posh English). 영국식 영어의 관념적인 ‘표준 발음’ 이다. [본문으로]
  6. Oblivate. <해리 포터 시리즈> 에 나오는 마법 주문이며 이것을 사용하면 기억을 지우거나 조작할 수 있다. [본문으로]
  7. Reliability. 측정 도구 및 데이터가 해당하는 현상을 일관되게 측정 및 지시하는 정도를 말한다. [본문으로]
  8. Validity. 측정 도구 및 데이터가 측정 및 지시하는 대상이 연구자가 조사하고자 하는 대상과 일치하는 정도를 말한다. 높은 신뢰도가 타당도의 필요 조건 중 하나이다. [본문으로]
  9. Operational definition. 추상적인 개념이나 표현을 측정 및 계량이 가능하도록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개념의 조작화’ 라고도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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