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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젠장! ‘나른한 탐닉’ 이라는 표현을 쓰자마자 바로 몸이 반응하는구만. 그 진득한 아편 연기가 몸 안에 스며드는 것 같아. 이건 한낱 비유가 아니지. 실핏줄이 우리 몸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건 참 근사한 일이라고.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느다란 수천 수만 개의 실핏줄을 타고 아편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공연장에 도착해. 그 핏줄 하나 하나에 뇌가 달린 느낌이랄까? 수만 개의 매혹이 동시에 탄성을 질러 대지. 지구상의 모든 악기가 동시에 내 몸에서 연주를 시작해. 그러다 한꺼번에 ‘포르테’! 세게 세게 더 크고 세게 끝까지 가 버리는 거야.
그 날의 장담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소. 우선 아편이 한양을 비롯한 내륙으로 스며들 것이라는 주장은 옳았다오. 지금 한양을 보시오. 나 같은 아편쟁이들이 몇만 명은 될 게고 또 이 쾌락의 선물을 피워 대는 아편굴이 몇십 군데는 될 게요. 하지만 다행하게도, 아니 희한하게도 그 아편이 빠른 시일 내에 조선 팔도를 덮칠 거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소. 아편은 그 때 내 생각과는 달리 한양은 물론이고 조선을 완전히 물들이지는 못했소. 거대한 청나라를 무서운 속도로 무너뜨린 그 아편이 그보다 훨씬 작은, 그것도 이미 망해 가던 조선을 잡아먹지 못했단 말이요. 이상하지 않소? 당시 조선은 아편에 물들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는데 말이오. 우선 조선은 청나라와 가장 가까운 나라였고 국가의 기강이 이미 무너져 있었으며 세계 열강들이 탐욕스러운 본색을 드러내며 국토를 유린하고 있었소. 망조가 든 나라의 관료들은 자기 살 길을 찾기에 바빴고 가진 자는 그 틈바구니에서 돈이 될 만 한 거라면 뭐든지 사고 팔았소. 아편 아니라 영혼이라도 말이요. 그 아수라장에 아편이 들어왔으니 누가 막을 수 있었겠소? 한데 말이오, 그 최적의 땅에서 아편이 기를 못 펴고 사라져 버렸단 말이요. 자, 형사 양반,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지금까지 한 말은 지금부터 할 말을 위한 전주곡이었소. 다시 말해 이제부터 진짜배기가 시작된다 이거지. 이유를 말해 주겠소, 아편이 조선을 점령하지 못한 그 이유를 말이오.
- 김탁환, <아편 전쟁>.
재수할 때 정말 열심히 읽었던 책이다. 언젠가 2챕터까지 연재된 네이버 포스트를 구독하다 사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인천 조계를 묘사한 부분을 인용하고 싶었는데 그건 너무 길어서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나중에 하든가 말든가 해야지. 이 소설은 그 부분이 정말 최고였는데. 아무튼 요약하자면 그렇게는 되지 않겠다고 바득바득 이를 갈던 사람이 결국 그렇게 되어 버리는 이야기이다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맹렬히 달렸건만 결국 지옥에 갇히고 말았소.’). 쉽게 말해 또 다른 파멸의 서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이야기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마지막에 심문 보고서가 붙는 바람에 이 모든 게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의 ‘아무 말 대잔치’ 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눈 감았다 뜨면 그 시대의 인천 조계지일 것만 같을 정도로 몰입해서 읽었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도대체 잘 써 놓고 왜 화자의 신뢰도를 저 멀리 날려 보낸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정말 힘들었던 건 이 글이 폭력의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탁하고 어두침침한 문장으로 불과 피가 처절하게 그려진다. 새삼 깨달았다. <노서아 가비> 와 <리심> 2권은 이 작가의 원래 문체와 거리가 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둘 다 여성 화자의 1인칭이다).
아무튼 <프라하의 묘지> 만큼은 아닌데 어디다 추천 못 할 책인 건 또 마찬가지다. 내 소설 취향은 정말... 정말이지 왜 이 모양인 걸까?
2018년 3월 19일,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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