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을 나서면서 제르베즈는 흥건히 고인 물 구덩이를 뛰어 넘어야 했다. 염색장에서 흘러 나온 물이었다. 그 날 여름 밤 하늘의 깊은 쪽빛 그대로인 물 속에는 관리인 거처에 달린 작은 야등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에밀 졸라, 1권. 펭귄 클래식 판 전체에서 내 기준으로 가장 예쁜 문장을 가져왔다. 이 작품은 절대 이런 분위기가 아니다. 내가 에밀 졸라 작품은 이것 하나 밖에 안 읽었으므로 할 말이 별로 없긴 한데 그는 정말 글을 잘 쓴다. 사람이 열댓 명씩 모여서 한나절 내내 같이 있는 장면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 (게다가 그 한나절이 각각 50페이지 정도 되는 한 챕터인데) 전혀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두 장면이 제일 재미있었다. 또 공간 묘사가 그야말로 그림을 그리는 것..
그는 밤이 오면 달빛이 은은하게 거리를 비춘다는 것을 모른다. 하늘 가득 별이 빛나고 그 별이 하루에 한 번씩 천구를 운행한다는 사실 또한 모른다. 달의 모양이 주기적으로 차고 이지러지며 오늘과 같은 보름 밤에는 그 창백한 빛에 거리가 은빛으로 빛난다는 것을 모른다. 그에게 밤이란 단지 소리가 가라앉는 시간이며 습기가 차고 기온이 낮아지는 시간이며 공기가 무거워지는 시간이며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시간일 뿐이다. 그는 자신의 집이 그림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의 집 벽 가득 그림을 그렸으며 붉은 노을과 짙푸른 밤하늘을 그려 놓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내가 단지 냄새를 묻히며 영역 표시를 하고 있다고만 생각한다. 내가 현관 문에 그의 초상을 그렸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
악단의 마차 세 대 모두 양면에 흰색 페인트로 ‘유랑 악단’ 이라고 적혀 있는데, 선두 마차에는 한 줄이 더 적혀 있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9월의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유랑 악단은 공항을 떠났다. 5주 간 공항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고 마차를 수리하고 저녁마다 셰익스피어 극을 공연하거나 연주회를 열던 유랑 악단이 떠난 뒤에도 음악과 연극의 여운은 오래도록 남았다. 그 날 오후 가렛은 밭에서 바닥을 쓸면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을 흥얼거렸고 돌로레스는 중앙 홀 바닥을 쓸면서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읊조렸으며 어린 아이들은 나뭇가지로 칼 싸움을 했다. -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 사실 아서 파트와 지반 파트는 특별한 인상이 남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아서 파트는 재미가 없었다). 클라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