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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관극 단상 (1) 'Fair is foul, foul is fair;'

루나 in Learning 2019. 4. 7. 16:56

<벙커 트릴로지> 의 에피소드 ‘맥베스’ 에는 원작을 아는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을 만 한 대사들이 거의 다 나온다. 어떤 대사는 3부작 전체에 걸쳐 한 차례씩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1막 1장의 마지막, 세 마녀들이 함께 말하는 이 대사는 나오지 않는다. 참고로 바로 아래의 인용은 열린책들 세계 문학 판의 번역.

 

아름다운 것은 추한 것, 추한 것은 아름다운 것,

안개 낀 더러운 대기 속을 날아다니자.

 

사실 이 대사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점이 좀 의아했다. 그런데 ‘맥베스’ 를 마지막으로 세 에피소드를 모두 보고 극을 곱씹어 보니 이 대사가 에피소드 각각의 캐릭터 설정에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사 1: ‘모르가나’ 의 란슬롯은 다혈질에 입이 다소 가벼운 인물이고 ‘아가멤논’ 의 알베르트는 과묵하고 진지한 인물이다. 병사 1 의 이러한 설정은 ‘맥베스’ 에서 기본적으로 진지하되 동시에 어느 정도 유머 감각을 갖춘 벤으로 합쳐진다.

병사 2: ‘모르가나’ 의 아서는 또래 집단의 리더, 즉 강자에 가까운 인물이고 ‘아가멤논’ 의 요한은 장애를 가진 유대인, 즉 명확한 사회적 약자이다. 병사 2 의 이러한 설정은 ‘맥베스’ 에서 장군이라는 강자성과 노동 계급이라는 약자성을 모두 가진 마크로 합쳐진다.

병사 3: ‘모르가나’ 의 가웨인은 순수와 감수성을 간직한 선에 가까운 인물이고 ‘아가멤논’ 의 연락병은 전쟁의 광기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철저히 내면화 한 악에 가까운 인물이다. 병사 3 의 이러한 설정은 ‘맥베스’에서 더 이상의 희생을 막는 옳은 일에 참여하는 매튜와 불필요한 희생을 강행하는 악인에 가까운 드레이크 장군으로 나뉘어 나타난다.

병사 4: ‘모르가나’ 의 그는 환각과 광기와 죽음 그 자체를 나타내는 관념이고 ‘아가멤논’ 의 크리스틴은 서프러제트 운동을 하던 사람인 만큼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병사 4 의 이러한 설정은 ‘맥베스’ 에서 극중극 <맥베스> 의 레이디 맥베스와 현실의 정의감 넘치는 릴리 간호사로 나뉘어 나타난다.

 

즉 <벙커 트릴로지> 의 에피소드들에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습들이 모두 나타난다. 인간은 가볍거나 무거울 수 있고, 강자이거나 약자일 수 있고, 선하거나 악할 수 있으며,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걸쳐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이 ‘맥베스’ 에서 모두 나타나고 그 에피소드에서 마침내 전쟁이 끝난다.

또 이러한 설정은 병사 4 가 이 극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해석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른 병사들이 가지는 반대되는 측면들은 캐릭터들의 설정에 국한된 부분이다. 그러나 병사 4 가 가지는 반대되는 측면들은 이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공간의 성격 자체를 바꿔 버릴 수 있는 - 요컨대 ‘메타적인’ - 설정이다. 그래서 아무리 남자 캐릭터들이 말이 많으니 어쩌니 해도 결국 이 극의 주인공은 병사 4 일 수 밖에 없다. 

 

2019년 2월 19일,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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