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 이 글은 쓴 사람 (루나) 의 자캐들이 등장하지만 뮤지컬 <최후진술> 의 작중 설정을 아주 살짝 가져다 썼습니다.
... 죽는다는 것은 잠든다는 것,
잠드는 것은 아마도 꿈 꾸는 것, 아아, 바로 그것이 문제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중.
그는 죽음을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죽음을 생각하느니 점심 식사를 하면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것이 더 나았다. 아니면 저녁 식사에 반주를 곁들이느냐 마느냐, 마신다면 무엇으로 하느냐 같은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라든가. 언제부턴가 잠과 꿈과 죽음 사이의 어떤 유사점이 느껴지면서 아지랑이처럼 두려움이 피어 오르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순간에 불과했다.
말이 나왔으니 그가 잠결에 보았던 꿈들 1의 수를 모두 헤아려 표로 만든다 치자. 그러면 그리 많지 않다가 30대 중반 무렵부터 갑자기 크게 늘어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유쾌한 꿈은 아니었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나는 게 나을 악몽이거나 이런 저런 기억들이 뒤섞여서 휘몰아 치는 꿈이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꿈이 기억 나지 않을 때조차도 찝찝했다. 그가 즐기지도 않던 커피를 매일 들이키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꿈이 끔찍하거나 찝찝하거나 중 어느 하나라면 차라리 잠을 자고 싶지 않았다. 길이를 어림하여 형용사로 나타내기 애매한 생의 뒤쪽 반 정도를 그렇게 살았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지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굳이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잠을 쫓는지 잠으로부터 달아나는지 모를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를 써서 회피를 하더라도 기절하듯 잠이 드는 일은 있게 마련이었다. 그 날, 번역 초고의 마감이 얼마 안 남은 그 날이 그랬다. 눈이야 원체 나빴지만 정말 글자가 심하게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작업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다.
‘잠깐만... 잠깐만 눈 좀 붙이자...’
그는 그러한 생각으로 잠깐 침대 겸 소파에 누웠다. 꿈은 끔찍할 터이지만 잠이 드는 순간만큼은 좋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순간,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몸이 말도 안 되게 가뿐했다. 이게 얼마나 오래 된 일인지 기억도 안 날 지경이었다. 그는 조용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마감을 생각하면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스산하고 어두운 한밤이었다. 그와 반대로 방 안은 밝았다. 불을 끄지 않은 탓이었다. 그는 언제나의 습관처럼 오른손을 더듬어 가며 안경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온 책상을 더듬어 봐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평소에 늘 두던 곳인데도 말이다.
‘이상하네...’
익숙한 방 안이라 뭔가에 부딪힐 일은 없었다. 허나 이렇게 계속 안경을 못 쓰고 있으면 정말 곤란해질 터였다. 그는 서로의 속으로 흐려지는 색깔 덩어리들 사이에서 손을 연신 허우적거렸다.
그러던 차에 인기척 비슷한 것이 느껴져 닫힌 문 쪽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방 주인은 이 낯선 방문객을 보기 위해 우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티를 안 내려 애를 써 가며 그를 훑어 보았다.
새하얀 셔츠 위에 단추가 두 줄로 달린 회색 조끼, 그리고 짙은 남색 긴 바지 차림이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럭저럭 평범하다고 생각되겠지만 그의 옷은 좀 달랐다. 셔츠의 품이 좀 컸고 양 손목에는 프릴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목에 새까만 크라바트를 매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이 면식 없는 누군가는 지난 세기 중반 정도의 차림을 한 셈이다. 게다가 창백하다시피 옅은 피부와 하얗다시피 옅은 금발이 파란 눈동자에서 보이는 날 선 차가움을 더욱 강조했다.
그는 왼손에 살짝 낡고 네모진 갈색 여행 가방을 하나 들고 있었다. 그의 것인 모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문은 분명히 닫혀 있었는데... 아무튼 이 사람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더니 이렇게 말을 걸어 왔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인사까지 생략하고 바로 이름부터?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싶었다. 이렇게 되면 그도 말이 곱게 나가지 않게 된다.
“그 쪽 이름부터 먼저 말하는 게 순서 아니겠어요?”
“제 이름은 로렌츠입니다. 그냥 그렇게만 아십시오.”
딱딱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무미 건조한 말투였다. 그리고 즉시 아까의 그 질문이 되돌아왔다.
“그럼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제는 정말로 이름을 댈 수밖에 없었다.
“카스파르.”
그러나 여전히 기분이 나빴기에 그 또한 만만치 않게 뻣뻣한 투로 답했다. 마지못해, 거의 뱉다시피.
“‘체’ 입니다만 - ”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으레 그것을 묻고는 했다. 실로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카스파르는 ‘만’ 을 한껏 길게 끌었다. 이 정도면 상대도 그의 기분이 어떤지 분명 느꼈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렌츠는 조용히 오른손에 든 얇고 텅 빈 서판을 왼손 검지로 몇 차례 건드렸다. ‘탁 타닥, 탁 탁 탁’.
“그것만 가지고는 못 찾습니다. 물론 ‘로렌츠’ 만으로 내가 바로 나올 리도 없으니 거기서 거기지만.”
“카스파르 베레트.”
‘탁 탁, 타닥 탁 탁’.
“아, 나왔군요. ‘카스파르 다비트 베레트’... 이거 당신 이름 맞습니까?”
카스파르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로렌츠는 숨을 한 차례 가다듬었다. 내키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그는 그 중에서도 가장 내키지 않는 일을 해야 한다. 마침내 그는 운을 떼었다.
“이런 말 하게 돼서 유감인데, 당신 방금 죽었습니다.”
이 선고에 대한 반응은 여태까지 두 사람의 대화 - 그렇게 말해도 될까 싶을 수준이기는 하지만 - 에서 가장 길면서도 격한 어조를 띤 문장으로 나타났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시지요. 지금 당신도 보이고, 내 방이 다 보이고, 당신 하는 말도 다 들리고, 결정적으로 그걸 다 느끼고 생각할 수 있잖아. 정말로 죽었는데 그런 게 될 리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건 꿈이야! 내가 수십 년 동안 잠 못 들게 만들어 오던 수많은 악몽이 또 하나 늘어난 거라고!”
그러나 이 나름의 항변은 이내 간단히 반박되었다. 그것도 그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이.
“그렇다면 지금 당장 가슴에 손 한 번 대 보십시오 - 어느 쪽으로든 말입니다. 충분히 답이 될 거라고 봅니다만.”
“내가 왜...”
그 때 로렌츠가 왼손으로 그의 오른손 손목을 붙잡았다. 카스파르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다. 여태껏 살면서 우정의 키스나 포옹도 웬만하면 정중하게 거절해 왔는데 하물며 초면에 이름만 아는 사람이 이렇게 낚아채듯...
“이게 무슨 짓...!”
그러나 로렌츠의 눈빛은 차갑고 진지했다. 거기에 한 순간 스쳐 지나가는 슬픔 또한 느껴졌다. 그 슬픔이 카스파르로 하여금 말을 삼키게 만들었다. 이어서 로렌츠는 자신이 붙잡은 것을 그대로 상대의 왼쪽 가슴팍에 갖다 댔다. 단면과 단면이 닿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 마찬가지로 그 자리에서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텅 빈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어...?”
당혹감에 절로 나온 말이었다. 로렌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파란 눈동자에는 진지함이 서려 있었다. 여전하게도 무미하고 건조한 말투로 답이 이어졌다.
“아까 안경이 안 잡혀서 놀라신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당신 시대에 맞춰 표현하자면 저도 당신도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요. 지금 당장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 사람에게 인간으로 인식될 거라고는 당신 시체 뿐입니다.”
‘당신 시체’ 라는 말에 움찔 한 카스파르는 여태 잊고 있었던 침대 겸 소파에 다가가 한 번 쳐다보았다. 분명 거울을 볼 때 늘 보이던 그 얼굴, 흰머리가 적잖이 섞인 검은 곱슬머리에 살짝 초췌한 얼굴이었는데 굉장히 낯설었다. 안경을 쓰지 않은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거기 누워 있는 건 한때 자신의 이름으로 불렸던 존재였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된 무엇이니까. 물론 편의상 계속 제 이름으로 불리기는 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했던 어떤 것이 이렇게 빠르게 낯설어질 줄 어찌 알았겠는가? 언제나 죽으면 다 끝이라고,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왔던 입장이라 더더욱 그랬다.
‘죽는다는 것은 잠드는 것, 잠드는 것은 아마도 꿈 꾸는 것’ 이라는 어느 유명한 비극 속 독백에 코웃음 친 적도 있었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으로 다 끝인데 어떻게 죽음이 잠이나 꿈과 같을 수 있겠는가? 주변에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다가 죽은 사람도 갑작스럽게 죽은 사람도 있었건만,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질리도록 악몽을 꾸다가 말 그대로 잠결 내지 꿈결에 죽어 버린 것도 모자라 이런 식으로 내세관까지 모욕 당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 끝입니까...”
의미 없는 질문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냥 그렇게 말이 흘러 나왔다. 로렌츠는 왼손으로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그 질문에 바뀐 것 하나 없는 예의 그 목소리로 자기 앞의 망자에게 답했다.
“... 네.”
“그럼... 그 가방은...”
카스파르는 거의 잊히다시피 한 여행 가방을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당신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당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로렌츠는 쪼그려 앉아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카스파르가 죽기 직전 - 아니 잠들기 직전에 벗어 놓은 것과 똑같이 생긴 안경을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눈 정말 나쁘시군요...”
“당신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카스파르는 건네 받은 안경을 입고 있던 윗도리에 대충 닦고는 양손으로 안경 다리를 들어 조심조심 귀에 걸쳤다. 서로의 속으로 흐려지던 주변의 덩어리들이 다시 원래대로 합쳐졌다.
“...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가 잠결에 보았던 꿈들의 수를 모두 헤아려 표로 만든다 치자. 그러면 그리 많지 않다가 30대 중반 무렵부터 갑자기 크게 늘어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유쾌한 꿈은 아니었다. 차라리 기억이 안 나는 게 나을 악몽이거나 이런 저런 기억들이 뒤섞여서 휘몰아 치는 꿈이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들은 방금 완전히 끝났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어쨌든 끝났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헤아릴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들었다.
로렌츠는 다시 가방을 왼손에 들고 카스파르에게 그것을 건넸다. 애 써 눈매를 풀고 운을 떼었다.
“그럼 가십시다.”
* 후기.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글은 개강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어느 학생이 정신을 놓고 틈틈이 타이핑을 한 결과물입니다. 오리엔테이션 주 안에 끝내고 싶었는데 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기력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냥... 맨 위에 적은 대로 <최후진술> 을 보고 나서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그걸로 한 번 써 봤습니다. ‘제 자캐가 죽었고 지난 세기 사람인 다른 자캐가 가이드로 왔다’ 이며 정말 그게 다입니다. 얘들은 어쩌자고 전자 양육자를 이런 사람으로 만나서 기껏 각 잡고 쓴 첫 연성에서부터 이미 죽어 있는 걸까요? 이거 상당히 미안해지네요. 그냥 다음 글에서는 좀 덜 미안하게 쓰는 수밖에 없을 듯 싶습니다. 그런데 다음에는 뭐 쓰지...
- 로렌츠가 검색을 할 때 나는 타자 소리는 해당 부분을 쓸 때 쿼티 자판으로 한 번 입력해 보면서 자연스럽게 박자를 맞췄습니다.
- 사담인데 저는 <최후진술> 을 죽음과 진실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했습니다. 리뷰 글 올릴 예정이니까 자세한 내용은 거기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각주 제외 공백 포함 5690자.
본문 공백 포함 5141자.
'연성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mpty Cupboard at Empty Purse (2018. 08) (0) | 2018.08.19 |
---|---|
der Anfang (2018. 07. 수정본) (0) | 2018.08.05 |
어떤 밤샘 (2018. 06) (0) | 2018.06.23 |
어떤 고용 (2018. 06) (0) | 2018.06.20 |
파편 - 크로키 1 (2018. 05) (0) | 2018.05.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