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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der Anfang (2018. 07. 수정본)

루나 in Learning 2018. 8. 5. 23:47

* 이 글은 역사 기반 2차 창작입니다.

* 세부 사항과 결론은 거의 사실에 가깝지만 이 글의 내용이 정확한 사실일 리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보고 과제를 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잘 알려지지 않아서 과제에 쓸 만한 내용도 아니겠지만요

* BGM 추천은 다음과 같습니다. 

ATOS Trio: Beethoven Piano Trio op. 1 no. 3 in c-minor - live. (https://m.youtube.com/watch?v=X91udLL_iNk) 

* der Anfang: 독일어로 시작이라는 의미입니다.

 

2의 누군가가 아니라 제 1의 내가 되세요

우리가 원하는 건 바로 당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 뮤지컬 <레드북> 당신의 얘기를 들려 줘요’.

 

바람이 부는 소리조차 청년에게는 음악처럼 들렸다. 붙잡아 보려 하면 어느새 저 반대편으로 가 버리는 점마저도 바람과 같은 그런 음악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빈은 음악의 도시이고 청년은 음악가이니까.

그는 정갈하고 깔끔하다고는 해도 근사하다고는 말 못 할 차림을 하고 있었다. 윗도리로는 어젯밤 다려 놓은 하얀 슈미즈 위에 중간 톤의 노란색 조끼를 입었다. 거기에 약간 낡은 짙은 남색 프록 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종아리 절반 정도까지 내려오는 새까만 바지를 입었다. 바지 아래로 보이는 스타킹은 슈미즈와 같은 색이었다. 목에 두른 크라바트는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얀 빛깔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냥 두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붕대 감듯 꽁꽁 싸매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청년은 오늘 있을 중요한 만남을 생각해 정성스레 그 옷을 골랐다. 20년 정도 전에 나온 어느 소설의 남자 주인공이 그 첫 장면, 첫 만남에서 입었던 바로 그 차림이었다. 그 주인공이 그 만남에서 일생일대의 사랑을 시작했으니 청년 또한 자신이 이 만남에서 일생일대의 가르침을 받게 되리라는 기대를 조금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딴 생각이 아니라 그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었다. ‘땅바닥이나 지도에 나 있는 길을 건반이나 현이나 악보에 적혀 있는 길처럼만 잘 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싶었다. 그러나 그는 음악 외의 것에는 영 서툴렀으며 그러한 자신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지나가던 사람에게 주소가 적힌 종이를 보여 주기까지 반 시간 가량 헤매야 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의 슈미즈는 땀에 푹 젖어 있었다. 프록 코트와 조끼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야말로 열의 달[각주:1]에 딱 맞는 열기에 된통 당한 셈이었다. 청년은 그 사이 반쯤 풀린 크라바트 매듭을 아예 한 번 풀었다가 다시 제대로 맸다. 목에서 난 땀이 크라바트를 거쳐 그의 손에 묻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찝찝했다. 얼굴이 절로 찡그려졌다. 어찌어찌 표정을 풀고 나서 그는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하인이 문을 열고는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청년은 빠르게 답했다.

제국과 황실의 카펠마이스터[각주:2] 살리에리 선생님을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그 분께서는 지금 바쁘십니다만.”

하인의 말투는 냉랭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청년한테도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약간 다급한 톤으로 이렇게 말했다.

“... 제가 하이든 선생님의 문하생이고 그 분의 소개로 찾아뵙게 된 거라고 한 번만 말씀 드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인이 답할 때까지 잠깐 대화가 끊겼다.

“... 일단 그렇게 하지요. 다만 어떻게 되든 제 책임은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적어도 청년에게는 문이 닫혔다가 다시 열리기까지의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졌다. 여태 왼쪽 겨드랑이에 끼워 놓고 있던 악보 공책을 꺼내 펼쳤다. 오른손에 연필을 들고 머릿속에서 빠르게 흐르는 음을 그대로 옮기다 보면 음표들과 쉼표들도 그 음이 그러하듯 종이 한쪽 귀퉁이로 휙휙 날아가려 들었다. 정말로 골치가 아픈 건, 실제 빠르기가 아무리 느려도 머릿속에서는 너무 빠르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어제는 그것을 좀 단정하게 다듬느라 시간을 적잖이 썼다. 이만하면 남들이 그럭저럭 읽을 만 할 거라 생각하며 청년은 공책을 덮었다. 그 때 다시 문이 열렸다. 아까 그 하인이었다.

한 번 만나 보겠다고 하시는군요. 들어오십시오.”

청년은 하인을 따라 실내로 들어갔다. 안이 살짝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유를 묻지도 내색을 하지도 않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간간이 밤에 불을 밝혀 놓을 촛대 몇 개가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장식이 별로 없는 영 썰렁한 집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온 실내가 집 주인의 음표와 쉼표로 가득하기에 장식이 필요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청년이 그렇게 그 다운 묘한 논리에 빠져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하인의 한 마디가 그를 다시 현실로 붙잡아 주었다.

이 방입니다.”

그들의 오른쪽에 나무로 된 문이 하나 있었다. 하인이 노크를 한 번 하고는 문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아까 말씀 드린 그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부드럽고 살짝 높은 테너 - 적어도 예전에는 노래를 꽤 잘 불렀을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말투는 흡사 벨벳 천이나 크림처럼 부드러웠다.

고생 많았어요. 이만 가 보도록 하세요, 마르틴 씨.”

마르틴 씨는 왔던 길로 저벅저벅 걸으며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예의 그 어두운 복도 속으로 거의 사라질 즈음 덜컥하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작달막하고 온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기가 가득한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하이든 선생님의 문하생이라고 했던가요? 만나서 반갑군요. 어서 들어와 앉아요.”

 

방 안은 꽤 넓었다. 집 주인이 음악가임을 증명하듯 벽 한쪽에 피아노포르테[각주:3]가 놓여 있었고 바로 그 벽 위쪽에는 바이올린 두 대와 비올라 한 대가 걸려 있었다. 익숙한 짙은 갈색이었고 또 익숙한 현들이었다. 다른 쪽 벽에는 악기들보다 좀 옅은 빛인 갈색 책장이 두 개 있었다. 한 책장에는 책이라기보다는 얇은 종이 뭉치에 가까운 것들이 가득 꽂혔고 나머지 하나에는 고급스럽게 장정된 책들이 좀 듬성듬성 꽂혀 있었다. ‘아마도 저 뭉치들은 전부 악보일 테지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누구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것은 아직 없을 터였다. 악기들과 책장들 사이 어딘가의 색인 테이블 위에는 가득 채워진 물병 하나와 유리컵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청년은 이 음악과 갈색으로 가득한 방 안에서 유일하게 초록색인 방석이 깔린 의자에 앉았다.

살리에리 악장[각주:4]은 제법 능숙하고 간결한 동작으로 물을 따르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은 짧고 단정했으며 잉크에 한 차례 푹 담근 듯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갈색 곱슬머리였다. 눈동자는 밤하늘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머리카락만큼이나 짙은 색이어서였다. 둘째, 그럼에도 그 빛이 유난히 밝은 보름달처럼 형형하게 빛나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진지한 표정에서는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졌다. 재능이 있는지 어떤지는 그가 같이 들고 온 악보 공책을 보아야 알 수 있겠지만 - 일단 마음가짐 하나는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궁정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자기 앞에 있는 이 청년에게 처음으로 질문을 했다.

좋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지요...?”

, 제 이름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라고 합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살리에리 악장은 그 이름을 한 번 입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그의 눈과 귀에 독일어가 훨씬 낯설었던 시절부터 들여 온 습관이었다. 언젠가 들어 본 것도 같은 이름이었지만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았다. 어차피 기억이 난다 해도 처음 보는 얼굴이니 이름을 아는 게 의미는 없었다. 그는 쉬운 길을 택하기로 했다.

내 이름이야 이미 알고 오셨겠지만... 서로 초면이고 하니 정식으로 소개하도록 하죠. 나는 안토니오 살리에리라고 합니다. 제국과 황실의 카펠마이스터죠. 다시 한 번 만나서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판 베토벤 씨.”

맙소사, 이런 일이 다 생기다니, 빈에 온 이후 초면에 제 성을 맞게 불러 주신 분은 악장님이 두 번째군요.”

청년의 표정이 조금 많이 풀어지면서 들뜬 말투가 나왔다. 살리에리의 입장에서는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다행스러움이었다. ‘설마 자식의 중간 이름을 그리스 신화의 목신에서 따 오는 사람이 있겠어[각주:5]하면서 그렇게 부른 거였는데 운 좋게 때려 맞힌 것이다. 둘째는 당황스러움이었다. 이름을 제대로 부른 게 맞으면 당연한 일을 한 건데 왜 이렇게까지 반색을 하는가 싶었다.

보통은 둘 중 하나였습니다. ‘을 떼어 버리거나 으로 착각하거나...”

살리에리 악장은 문득 그 첫 번째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무례한 질문일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은 바로 화제를 바꿨다.

,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건 조만간 출판을 하게 될 작품인데 한 번 보시고 작품 번호를 붙일 만 한지 의견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악보 공책을 펼쳐 들어 중간 어느 페이지를 보여 주며 이게 첫 악장입니다라고 말했다. 살리에리 악장은 그것을 받아 들어 맨 앞에 적힌 것들을 파악했다 - 플랫 세 개, 4분의 3박자, ‘알레그로 콘 브리오[각주:6]’. 이어서 첫 마디를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다 단조라, 그 조성은 대체로 질풍노도[각주:7] 같은 음을 내므로 어지간해서는 다루기 어려운데...

혹시 이전에 다른 작품을 출판한 적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 남의 작품에서 주제를 가져온 변주곡 하나였고 좀 더 커서 피아노 소나타 셋이었죠.[각주:8]겨우 열한 살인 제가 작곡가인 척을 하면 다른 음악가들이 뭐라고 할까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음악의 신께서 계속 해서 저를 재촉하시는지라 이에 복종하여 감히 작곡을 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 몇 년이라거나 성인이 된 뒤같은 조건이 붙는다면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제대로 출판하는 건 이게 처음이라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실로 과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악기 편성은 피아노와 바이올린과 첼로, 다시 말해 전형적인 피아노 3중주였다. 오선 세 개가 세로 줄 하나로 엮인 채 하나의 선율로써 달려 나가고 있었다. 글씨에 대해 말하자면 단정하게 쓰려고 애를 많이 쓴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살리에리 악장이 보기에 그 노력은 실패했다. 선이 가늘어서 더 어렵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을 들여 오선 위에 쓰인 음표들과 쉼표들을 따라가 보니 어떤 것이 느껴지기는 했다. 흡사 무대 위로 올라가는 배우의 당당한 걸음걸이처럼 느껴지는 리듬이었다. 그리고 그 배우는 그 무대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 그의 배역이 지금 어느 것이든 그것은 문제 없었다. 이 배우는 언젠가 주인공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음 악장은 내림 마 장조에 4분의 2박자, ‘안단테 칸타빌레 콘 바리아치오니[각주:9]였다. 아까의 그 당당한 배우는 어디로 가고 단정하고 깔끔하게 차려 입은 소프라노 가수가 나타나 노래를 불렀다. 소름 끼치도록 여리고도 감미로웠다. 게다가 바이올린의 피치카토[각주:10]와 피아노의 스타카토를 이렇게나 잘 쓰다니, 이 청년은 현을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살리에리 악장의 머릿속에는 큼직한 물음표가 세 개 찍혔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이 두 악장을 같은 사람이 썼다는 사실을 내가 믿어야 하는 걸까?’ 마지막 세 번째는 그의 머릿속에 찍히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소리가 되어 나왔다.

하나 물읍시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어떻게 되시나요?”

청년은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다 해서 세 가지 -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비올라입니다[각주:11].”

살리에리 악장은 더 묻는 대신 조용히 페이지를 넘겼다.

3악장 미뉴에트, 콰시 알레그로[각주:12]는 미뉴에트가 대체로 그렇듯 짧았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 동안 소프라노 가수는 목소리를 한껏 내려 콘트랄토[각주:13]가 되었다. 조성은 다시 다 단조였는데 트리오 파트에서 난데없이 다 장조로 바뀌고 피아노 건반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두 옥타브 가량 훑어 내렸다. 살리에리는 웃음이 나려던 것을 어찌어찌 참았다. 그에게는 순수한 즐거움에서 나오는 웃음이었지만 청년에게도 그러할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악장 - 2분의 2박자 프레스티시모[각주:14]’ - 에 가서야 첫 악장의 그 배우가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아까의 그 의상과 분장은 없었다. 대신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나타났다. 첫 악장보다도 더 강했다. 이 배우는 자신이 실제로 어떠한 사람인지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극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기에 이 청년도 꽤나 긴 치아마타 알라 리발타[각주:15]를 만들어 낸 것 같다. 아무튼 그리하여 이 배우는 자신의 배역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게 되었다.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느새 플랫들이 죄다 사라져 있었다. 아마 듣기만 했다면 눈치를 못 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살리에리 악장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면 브라보, 브라보하고 외치거나 - 그것도 아니면 둘 다 하거나. 허나 그것이 비웃음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 동안 물을 한 잔 마신 청년이 말을 꺼냈다. 눈빛은 굉장히 진지해져 있었고 음조도 다시 조금 높아져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고로 말씀 드리자면 하이든 선생님께서 이 곡은 출판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세상에, 세상에... 일단 나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피아노 3중주가 이렇게나 큰 편성이었나 싶었습니다. 약간 서사적인 느낌도 많이 났고요.”

청년은 적어도 자기 것만큼은 짙은 빛깔인 악장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흡사 눈빛으로 정말입니까?’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살리에리 악장은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을 한 마디 덧붙였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랐다 - 이번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이 지금도 하이든 선생님의 문하생이라면 지금쯤 그 분의 비서 자격으로 런던에 있어야 할 텐데[각주:16], 무슨 사정이 있었나요?”

조금 긴 침묵이 흘렀다. 청년이 미간을 찌푸리며 눈동자를 살짝 위로 올렸다 내리는 동안 악장은 눈을 깜빡이며 물을 마셨다. 살리에리가 빈 컵을 내려놓을 즈음에 청년이 입을 열었다.

하이든 선생님이 거기까지만 이야기를 하셨더라면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이런 제안을 하셨죠. 3중주 작품들을 출판할 때 표지에 제 이름을 하이든의 제자 베토벤이라고 쓰면 어떻겠느냐고 말입니다.”

청년의 목소리는 어딘지 싸늘했다. 그는 물을 따르더니 한 입에 들이키고서야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제 이름만으로 충분하다고 - 다른 무엇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이름을 넣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왜냐 하면 이 작품은 음표 하나 쉼표 하나 빼 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를 잠깐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제 작품에 이름을 다시겠다...?”

그는 자를 유난히 길게 빼며 차가운 웃음 소리를 냈다.

하긴, 익숙한 일이긴 했습니다. 혹시 몇 년 전에 발트슈타인 백작이 발레를 작곡했다는 이야기 들어 보셨습니까? 제 이름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실 그 발레는 제 것입니다[각주:17]. 백작의 마지막 양심이라면 직접 찾아와 악보를 받아 갔다는 점이겠지요... , 어디 가서 함부로 떠벌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제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저는 아직 작곡을 좀 하는 피아니스트에 불과하니 말입니다. 다 겪어서 아시잖습니까, 작위 가진 사람들이 어떠한지는...”

살리에리 악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 아무튼 중요한 건 제가 그 때 기분이 정말 나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길로 발길을 끊었지요. 얼마 뒤 하이든 선생님이 다시 런던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잠깐 후회를 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대로 그 곳까지 따라갔더라면 제가 또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알고 익힐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그건 있겠네요 - 말이 안 통할 테니 제가 상당히 답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러나 그런 건 전적으로 저의 문제이고 제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요.”

살리에리 악장은 여기까지 들으면서 자신을 찾아온 이 청년이 어떤 사람인지 대강 파악했다. 우선 목을 완전히 싸매 놓은 크라바트와 다소 딱딱한 아주높임으로 보건대 그는 자신에게 꽤 엄격한 모양이었다. 한 사람의 삶이 악보라 한다면 그의 것에는 쉼표가 그리 많지 않을 듯 느껴졌다. 또 어떤 식으로든 큰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이 자신에 있는지부터 따질 것 같았다. 그러다가도 말이든 음악이든 기회만 생겼다 하면 누가 안 시켰는데도 자신의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은 그에게 쌓이고 담긴 감정과 말이 제법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표정에서는 빛과도 같은 어떤 것이 느껴졌다. 빛은 차가움과 뜨거움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고 갈 수 있다 - 달에서 나오는 빛은 차갑지만 벽난로의 불에서 나오는 빛은 뜨거운 것처럼. 그의 눈동자와 그의 3중주가 그러했다.

카펠마이스터가 아닌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솔직히 말하자면 살리에리는 이 청년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그가 찾는 것은 이미 그의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을 이렇게나 잘 다루는데 이 갈색 방 안까지 들어와 피아노포르테를 쳐 보며 악상을 다듬고 대위법과 목소리나 대사를 다루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게나 자신에게 엄한 사람이 과연 극장 감독과 리브레티스트[각주:18]나 악단 연주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진심으로 가르침을 바라는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가스만 선생님[각주:19] 을 생각해서라도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는 그럴 수만 있다면 도움을 주기로 맹세한 삶이었다. 확실치도 않은 물음표에 그 맹세를 저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이 청년이 찾고 있으나 이미 그에게 담겨 있는 것 중 하나 말이다. 바로 여전히 살리에리의 손에 들려 있던 이 악보의 출판 여부였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하나였다.

판 베토벤 씨.”

살리에리 악장은 음절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가며 말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이 작품을 여기까지 들고 온 게 이미 이것을 출판하고 싶다는 의미 아닐까요? 아마 내가 말린다 해도 당신은 그것을 듣지 않을 겁니다. 그럴 것 같았다면 이것을 내게 보여 주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말한 뒤 살리에리 악장은 그 악보를 다시 청년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청년이 살리에리의 미간을 쳐다보았다 - 생각하고 있던 바를 완전히 꿰뚫린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는 채였다. 피아노포르테의 최고음에서 최저음까지 알레그레토[각주:20]로 한 번 훑어 내려갔다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올라올 만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청년이 답했다.

“... 알겠습니다. 선생님 의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 청년의 표정은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살리에리 악장은 예상을 했지만 나중에야 확인하게 된 사실이었는데, 그건 꽤 드문 일이었다.

 

어느새 해가 조금씩 붉어지는 시간이었다. 그들이 밖에 나와 다음을 기약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선생님, 진심으로 부탁 드립니다. 다음부터는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말을 높이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나에게는 이게 가장 편합니다. 하지만 정 그러시다면 다음부터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하겠어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납시다, 루트비히 씨.”

“... 감사합니다. 다시 찾아 뵐 때부터는 미리 편지라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청년은 그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 집 주인은 청년이 아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은 순전히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었다. 커피 가루와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그 검고 붉은 빛깔이 우러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재능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었고 오늘은 특히 더 그러했다.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리라 -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청년은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걸었다. 앞으로 자주 오게 될 터이니 이 근처를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이 건물의 창문 장식이 어떠한지 저 건물의 기둥 모양이 어떠한지, 악보 위의 음표와 쉼표를 읽듯 눈으로 찬찬히 읽어 나갔다. 그것이 바로 그가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바람이 부는 소리조차 청년에게는 음악처럼 들렸다. 붙잡아 보려 하면 어느새 저 반대편으로 가 버리는 점마저도 바람과 같은 그런 음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붙잡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빈은 음악의 도시이고 청년은 그 자신이지 다른 누군가가 아니니까.

 

* 후기 1.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84월 한 달 - 실은 거의 중간고사 기간 2주이긴 하지만 - 동안 초고를 썼고 이후 약간의 퇴고를 거쳐 완성했습니다. 진득하게 완성한 글은 이게 처음이라 정말 뿌듯하네요. 쓰는 입장인 저한테도 시작이고 내용상 이 분들한테도 시작이고 나오는 곡은 작품 번호 1번이니 정말 잘 지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본적으로 사실에 가까운 인물 묘사를 하고자 노력했는데, 막상 결과물은 제 해석이 잔뜩 들어간 것도 모자라 사실 면에서 뭔가 아주 결정적인 것을 하나 빼먹고 말았습니다. 눈물이 나네요. 다음에는 꼭 들어가도록 해야겠어요.

다 끝낸 지금의 이 기분을 아마도 못 잊을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글을 쓰고 다른 글로 찾아 뵙게 될지도 모르죠. 일단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요. 그럼 저는 여러분이 읽다가 어라?’ 싶었을 부분들에 대한 몇 가지 설명만 추가하고 말을 마치겠습니다.

 

201857, 루나.

 

- 베토벤의 외모와 옷을 묘사할 때는 카를 트라우고트 리델이라는 화가가 1801년에 그린 그의 초상화를 참조했습니다. 이 글의 배경은 17948월 정도니까 시차가 무려 7년이나 나기는 하는데... 솔직히 초상화만 따지면 만 서른 살이라고는 안 믿깁니다. 그러니까... ... ... 잘생겼어요. 진짜로요. 진짜 잘생겼어요.

- ‘20년 정도 전에 나온 어느 소설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뇌> 입니다. 다만 베르터는 프록 코트가 아니라 연미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 살리에리 악장님이 악보를 읽으며 배우와 가수를 연상하던 곡은 베토벤 피아노 3중주 제 3(작품 번호 1-3) 전곡입니다. 아주 나중에는 본인에 의해 현악 5중주 (작품 번호 104) 로 편곡되기도 했어요.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지만 제가 많이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요. 클래식 음악에 관심 있으시다면 한 번 들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재판 추가 설명>

- 각주 7번에 대한 추가로 이야기를 하자면, 실제로 서양 음악사에서 원래 다 단조는 그렇게 많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이 쓰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그가 이 조성을 사용한 곡들은 특히 강하고 극적이며 소위 폭풍 같은느낌이 두드러진다는 특징이 있는데, 대표적인 예시로는 피아노 소나타 제 8비창’ (작품 번호 13), 교향곡 제 5운명’ (작품 번호 67) 등이 있습니다.

- 초고를 쓸 당시에는 굳이 조사를 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1794년 여름에 하이든은 런던에 있었습니다. 확인을 해 보니 정확하게는 17941월에 떠났다고 하는군요.

 

* 후기 2.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글은 원래 LED님과 함께 연성한 뒤 딱 두 권만 뽑아서 하나씩 나눠 가진 트윈지 <Duet> 에 실었던 글입니다. 나중에 지인 분께 몇 문단 보여 드렸는데, 문장의 호흡이 상당히 긴 것 같다는 의견을 주셨어요. 그래서 한 번 문장을 다듬었습니다. 두 달 전과 비교해 내용 자체는 바뀌지 않았지만요.

맨 처음 쓴 후기에서는 분량 상 줄였지만 이번에는 맨 앞에 인용한 뮤지컬 <레드북> 의 넘버에 대해 이야기 할 생각입니다. 첫째, 이 글은 시작으로 가득하지만 (제목의 뜻, 관계의 시작, 공식 작품 번호 1, 쓰는 사람의 첫 글이라는 점) ‘당신의 얘기를 들려 줘요는 뮤지컬의 마지막 넘버입니다. 둘째, 로렐라이가 말하는 2의 누군가1의 나사이의 차이를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보통 오래도록 기억되는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와 비교되어서가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기억되니까요.

사실 저는 피아노 3중주 제 3번이 누가 뭐라고 했든 결국 공식 작품 번호를 달고 나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분은 그런 분이니까요. 그냥 제가 오랫동안 생각한 바를 글로 썼다는 사실 정도에 만족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글로 뵈어야 하는데, 다음 글은 어떤 내용일까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2018714, 루나.

 

각주 제외 공백 포함 12185.

본문 공백 포함 10210


  1. Thermidor. 프랑스 공화력의 11월로 그레고리력에서는 7월 말에서 8월 중순까지의 기간이다. [본문으로]
  2. Kapellmeister. 왕족이나 귀족, 또는 교회에 고용되어 음악과 관련된 일들을 담당하는 자리이다. 살리에리의 경우는 합스부르크 황실에 고용되어 있었으므로 ‘궁정 악장’ 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다. [본문으로]
  3. Pianoforte. 흔히 ‘피아노’ 라고 줄여 부른다.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 같은 기존의 건반 악기들과는 달리 강약 조절이 용이하다는 차별점이 있었기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 모차르트가 처음에 하프시코드를 쓰다가 피아노로 옮겨 갔으며 베토벤이 처음부터 피아노만 사용한 첫 세대이다. [본문으로]
  4. 여기서부터 ‘살리에리 악장’ 은 Kapellmeister 이고 그냥 ‘악장’ 은 movement 이다. [본문으로]
  5. 한국어가 f 발음과 p 발음을 구별하지 않는 언어이기에 가능한 표현이다. 로마자 (그리고 독일어) 에서는 발음과 표기가 모두 다르다. [본문으로]
  6. Allegro con brio. ‘빠르고 생기 넘치게’ 라는 의미의 빠르기말이다. 이하 음악 용어들은 모두 이탈리아어이다. [본문으로]
  7. Sturm und Drang. 18세기 중후반 (대략 베토벤의 직전 세대) 독일어 사용 지역의 예술 - 특히 문학 및 음악 사조이며 강한 감정 표현과 급격한 대비를 특징으로 한다. [본문으로]
  8. 변주곡은 ‘드레슬러의 행진곡 주제에 의한 9개의 변주곡’ 이고 피아노 소나타는 ‘선제후 소나타’ 를 말한다. 정식 작품 번호가 붙지 않았으며 각각 베토벤 사후 매겨진 작품 번호 외 63번과 47번이다. [본문으로]
  9. Andante cantabile con Variazioni. ‘노래하듯이 느리게 변주곡 풍으로’ 라는 의미의 빠르기말이다. [본문으로]
  10. Pizzicato. 찰현 악기에서 활을 사용하지 않고 현을 손가락으로 퉁겨서 연주하는 방법이다. [본문으로]
  11. 베토벤은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으며 비올라의 경우도 오케스트라나 현악 4중주에서 맡았던 악기이므로 어느 정도의 실력은 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이올린은 배우기는 했다고 하나 특별히 남은 기록이 없다. [본문으로]
  12. Minuetto, Quasi allegro. ‘미뉴에트, 알레그로에 가깝게’ 라는 의미의 빠르기말이다. [본문으로]
  13. Contralto. 서양 성악에서 여성의 가장 낮은 성부이다. [본문으로]
  14. Prestissimo. ‘극히 빠르게’ 라는 의미의 빠르기말이다. [본문으로]
  15. Chiamata alla Ribalta. 이탈리아어로 ‘커튼 콜’ 이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16. 이 무렵 하이든은 두 번째로 영국 여행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빈을 떠나 있기는 했다. [본문으로]
  17. 베토벤의 작품 번호 외 1번인 ‘리터 발레 (Ritterballett)’ 를 말한다. 실제로 이 작품은 꽤 오랫동안 발트슈타인 백작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다. [본문으로]
  18. 오페라, 뮤지컬, 발레, 칸타타 등의 음악극 장르에서 사용하는 대본을 ‘리브레토 (Libretto)’ 라고 하고 리브레토를 쓰는 사람을 ‘리브레티스트 (Librettist)’ 라고 한다. [본문으로]
  19. 플로리안 레오폴트 가스만 (1729~1774). 살리에리의 스승이자 은인이었다. 본문 시점에서는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다. [본문으로]
  20. Allregretto. ‘조금 빠르게’ 라는 의미의 빠르기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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