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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Empty Cupboard at Empty Purse (2018. 08)

루나 in Learning 2018. 8. 19. 02:34

찬장과 지갑이 동시에 비는 것 만큼 난감한 일도 또 없다. 그것은 위장이 비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난감한 일이 끔찍한 일의 전조라고 하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찬장과 지갑이 비는 것은 물리적으로 나와 무관한 일이지만 위장이 비는 것은 나 자신의 일부가 비는 일이니까.

혼자 살게 된 지 어느덧 1, 지금의 유니스 도메니카 크로체타가 바로 이런 상태였다. 대학생이 많이 찾아오는 큰 카페는 시험 기간만 되면 미칠 듯이 바빠졌고 고용주라는 인간은 며칠 동안 초과 노동을 시킨 주제에 임금도 안 주고 버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유니스는 퇴근하는 길에 식료품점을 들를 시간도 돈도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지금의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오블리비아테를 써서 임금을 두 번 받아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뒷일 생각만 안 했다면 이미 그러고도 남았다. 이 온갖 뒷일들을 다 생각하자면 그야말로 가슴 한 구석이 갑갑해지며 빈 지갑에 더더욱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그러나 분통을 터뜨려 봤자 남는 것은 없을 터였다. 그래서 그는 침착하게 남은 것들을 헤아려 보기로 했다. 혹여나 떨어뜨릴까 봐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으로 받쳐 가며 꺼냈다. 아까의 말은 정정해야겠다. 찬장이 문자 그대로 빈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날 하루 굶지 않을 정도의 음식이 들어 있었다 - 통조림으로 된 토마토 수프와 버섯 수프가 각 한 통씩, 그리고 스파게티가 조금 남아 있었다. 1인분 이상 2인분 미만. ‘지지난 주에 아무렇게나 집어서 토마토 파스타를 해 먹었는데 양이 좀 많다 싶었더니 오늘 이 꼴이 나는구나.’ 과거의 손짓 하나가 이렇게나 큰 후회로 돌아오다니, 유니스의 얼굴에 쓴웃음이 절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식탁 위에 있는 얼 그레이 틴 케이스를 열어 보았다. 닥닥 긁으면 한 잔 우릴 정도는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이렇게 오늘 차 마시기는 꿈에서도 못 할 일이 되고 말았다. ‘우유야 뭐 원래 안 넣으니 괜찮지만 설탕이 있는데 차가 없다니, 유진 오빠나 엄마가 이걸 모르게 해야 돼.’ 그 사람들이 알았다가는 당장 하던 거 다 그만두고 본가로 돌아오라고 할 게 빤했다. 그건 전혀 유니스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나 부담스러워질 줄 미리 알았더라면!

이제는 이걸 어떻게 해서 먹을까 생각해 볼 시간이었다. 토마토 수프에 파스타를 넣어 토마토 스파게티로 먹는 건 흔히 떠올릴 만한 방법이다. 버섯 수프도 크림 소스를 쓰니 비슷한 방법으로 먹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 아침 메뉴로 버섯 수프는 역시 아닌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크림 수프라니, 그건 너무 느끼하잖아.’

그래서 우선 버섯 수프 통에 적힌 조리법을 꼼꼼히 읽었다. 어쩔 수 없었다. 유니스의 요리 실력은 철저하게 기록에 의존하기에 그 때 그 때 볼 조리법이 필수였다. 오죽하면 분가를 하기 전에 요리 책 하나를 노트 하나에 베껴 놓았겠는가? 그 노트는 지금까지도 식탁 위 틴 케이스 밑에 잘 놓여 있다가 끼니 때면 펼쳐지고는 한다.

큰 냄비에 물을 받아 끓이고 스파게티를 전부,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탈탈 털어 넣었다. ‘알 덴테[각주:1]같은 건 애초에 못 할 짓이었다. 유니스는 10분 정도 시계를 쳐다보다가 반쯤 의례적으로 면 한 가닥을 꺼내서 씹어 보았다. 다행히 면은 잘 익었다. 움푹한 샐러드 볼로 건져 냈다. 그 뒤 왼손으로 볼을 들고 오른손으로 면을 눌러 뜨거운 물을 빼고 찬 물을 받아 헹궈 주었다.

다음으로 통조림 버섯 수프를 따서 작은 냄비에 부었다. 불은 중불로 맞춰 놓고 나무 주걱을 왼손에 들고서 약간 힘을 실어 천천히 저었다. 수프가 익으면서 조금씩 맛있는 냄새가 올라와 코를 간질였다. 그냥 이 자리에 선 채 바로 떠 먹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아까 삶은 파스타의 존재 의의가 뭐가 되겠는가? 결국 5분 정도 뒤 유니스는 파스타가 얌전히 담긴 샐러드 볼에 걸쭉한 국물을 그대로 부었다.

식사 기도 따위는 애초부터 생략되어 있었다. 식사를 하는 사람이 철저한 유물론자이니까. 대신 음식이 불거나 식으면 안 되므로 왼손에 포크, 오른손에 스푼을 들어 비장하게 파스타를 돌돌 말았다. 그럭저럭 골고루 버무려진 수프는 걱정했던 것에 비하면 맛이 좋았다. 다행한 일이었다.

 

찬장과 지갑이 동시에 비는 것 만큼 난감한 일도 또 없다. 그것은 위장이 비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난감한 일이 끔찍한 일의 전조라고 하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찬장과 지갑이 비는 것은 물리적으로 나와 무관한 일이지만 위장이 비는 것은 나 자신의 일부가 비는 일이니까.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위장이 비는 것은 일시적인 미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유니스는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괜히 깨어 있어 봤자 더 배고프기만 할 테니까.

몸을 씻고 내일 입을 옷을 준비해 놓는 동안 유니스는 최대한 시간과 동작을 줄이려 애를 썼다. 그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언제나 거슬리는 것이 가장 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을 하고 움직이며 살아 왔으니까.

마침내 그가 잠에 들기 직전에 떠올린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내일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받아 내야지, 빌어먹을 고용주 같으니라고.’

 

* 후기.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 글은 유니스가 출판사 편집장이 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하다가 썼어요. <어떤 고용> 을 쓸 때 짧게 언급했던 것 같은데... 그걸 구체화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소재가 나온 건 마침 813, 세계 왼손잡이의 날이었고요. 저 아무래도 유니스를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아끼나 봐요. 사실 정말 사랑스러운 친구기는 하죠.

정말... 언제나 경이로울 만치 내용 없고 밋밋한 글인데... 또 읽어 주시는 분들이 계시고... 너무 감사합니다...

 

2018819, 루나.

 

- 제목은 뮤지컬 <레 미제라블> 의 넘버 ‘Empty Chairs at Empty Tables’ 를 생각하며 지었습니다. 제목만 그렇습니다.

- 이건 사담인데, 저는 파스타를 먹을 때는 크림 소스를 가장 좋아합니다. 토마토 소스는 엄청 맛있는 하우스 레시피가 있어서 외식할 때는 절대 안 먹고, 오일이나 샐러드 파스타는 많이 안 먹어 봐서 얘기를 하기 어렵네요. 이 글 쓰다 보니 먹고 싶어져서 눈물 줄줄 흘리는 중입니다.

 

각주 제외 공백 포함 3126.

본문 공백 포함 2570.  

  1. Al dente. 파스타 건면이 씹는 맛이 날 정도, 즉 이로 씹었을 때 단단함이 느껴질 정도로 살짝 덜 익은 상태를 뜻한다. 반대로 ‘충분히 익힌 상태’ 는 ‘벤코토 (Bencotto)’ 라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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