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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공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야기 -

정신 질환 (mental disorder) 을 분류하는 기준에 따르면 류순호는 (극 중 다른 캐릭터들의 생각과 달리) ‘미치지않았다. 우리가 흔히 미쳤다라고 부르는 상태는 정신증, 그 중에서도 주로 조현병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현실 판단력 - 즉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을 하는 능력 - 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류순호의 경우 전쟁 상황 (특히 악몽에게 빌어넘버에서 나온 형이 눈 앞에서 총에 맞아 죽은 일) 에서 흔히 나타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신경증, 특히 불안 장애로 분류된다. 그래서 형이 죽을 때의 상황을 계속 꿈으로 겪고 있는 것이고 (이로 인해 잠을 잘 못 자는 것도 포함된다) 어디서 큰 소리만 나도 깜짝 깜짝 놀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극의 배경이 1952년 여름이니 징집된 이후의 기간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한 달은 넘을 것이다.

즉 아주 대략적으로만 따져 봐도 류순호의 진단명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확 와 닿게 설명해 보자면 정신 의학적으로 류순호는 화관을 쓰고 꽃다발을 들고 춤을 추면서도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다른 캐릭터들이 류순호가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1950년대에는 이러한 질환이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정신 의학 관련 종사자들 사이에서도 사실상 최신 연구 주제였을 것이다. 다만 현재의 관객인 우리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내 전공과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 (간접적으로는 있겠지) -

원 투 쓰리 포넘버는 처음 봤을 때부터 정말 매력적이었다. 여신님 백 일 잔치 준비 과정에서 변주화가 춤을 가르쳐 주는 내용인데, 다시 보고 나서 대본집까지 읽어 보고 생각을 해 보니 왜인지 모르게 이 장면 전체가 예술 작품의 창작과 감상을 은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먼저 이들이 준비 자세를 취하고 서 있기 전에 짧은 암전이 있고, 조명이 다시 켜지면 그들은 조금 전에 빨아서 말린 군복 윗도리를 파트너라고 생각하며하나씩 들고 서 있다. 그렇다. 관객들이 한 시간 정도 전에 객석이 어두워지면서 했던 바로 그 일시적인 합의 (‘앞으로 두 시간 동안 여기는 2020년의 극장이 아니라 1952년의 무인도이며 나와 있는 사람들도 배우가 아니라 캐릭터들이다’) 와 비슷한 것을 이 캐릭터들도 거친 것이다 - ‘지금 들고 있는 이것은 군복 윗도리가 아니라 댄스 파트너이다’.

그리고 이렇게 춤을 가르치던 중 변주화는 리듬을 타는 방법 (‘나는 물입니다, 흐르는 물입니다’) 을 알려 주면서 이것을 자신에게 가르쳐 준 동생과의 기억을 떠올린다.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관극을 할 때 수많은 딴 생각들을 한다. 리뷰들도 가만 보면 그나마 정제된 표현을 쓰고 있어서 그렇지 잘 읽어 보면 딴 생각들이 잔뜩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딴 생각들은 대개 내가 겪었거나 배운 것들, 다른 작품을 보거나 들으며 생각했던 것들 - 요컨대 나의 기억에서 나온 것들이다.

여신 역 배우가 변주화의 동생을 겸하는 것은 이러한 기억이 (그들이 만들어 낸 여신님이 그러하듯) 물리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고 변주화의 동생 모습을 한 여신과 다른 병사들도 잠깐씩 춤을 추는 것은 이러한 기억을 그들이 함께 나누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2020413,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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