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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공연의 재미를 알기 전이라고 해서 아예 본 게 없지는 않다.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나에게도 그 즐거움은 스며드는 식이었으니까. 슬픈 게 있다면 그렇게 스며드는 동안에 재미있게 본 공연들이 잘 기억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중간이 뚝 잘려 나간 느낌이다. 기억과 알코올의 공통점이 바로 이것이다. 잘 날아간다는 점 말이다.
예를 들어 <레드북> 을 본 기억은 1막 마지막 넘버인 ‘나는 야한 여자’ 가 끝나고 뭔가 엄청나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 느낌이 거의 마지막 기억이다. 2막 내용은 줄거리 이상으로 남은 게 별로 없다. 몇몇 넘버들의 후렴구가 좀 열심히 생각해 보면 기억날까 말까 하기는 하지만.
거의 4개월 뒤에 다시 본 <라흐마니노프> 는 더 심각하다. 이야기 자체도 음악도 분명 많이 즐기기는 했는데 사실상 달 박사가 악수를 청할 때 실수로 왼손을 내미는 장면 하나만 확실하게 기억 난다. 넘버는 그래도 기억이 나지만 아마 내가 OST 를 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된 게 특히 더 억울한 이유는 시놉시스를 보자마자 어떻게든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최후진술> 도 중간 부분이 참 머리에 남지를 않았다. 어디서 농담으로 많이 본 거 같은 그 가사 (‘여러분 제발 책 쓰지 마세요 / 제 멋에 겨워서 함부로 책 쓰면 / 무식의 증거가 영원히 남아요 / 게으른 정신을 그대로 들켜요’) 가 이 극의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 뒤부터 기억이 희미하다. 다음 시즌을 봤기 때문에 어떻게든 극의 내용은 기억할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 본 날은 거의 뭐가 뭔지 모르겠는 얼떨떨한 느낌만이 남아 있다. 갑자기 나눔을 받아서 본 거였기 때문에 어떠셨냐는 지인 분의 질문에 도저히 답을 할 수가 없어 살짝 난감했다. 다행히 그게 좀 보통의 반응이기는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렇게 기억이 안 나는 중에도 넘버 제목을 아는 이유는 그런 식으로 발을 담글락 말락 할 적에도 웬만하면 프로그램 북을 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미 직감이 있기는 했던 것 같다 - 이게 그냥 몇 번 정도 하다 말 경험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 말이다. 그 때 거리낌 없이 거기에 돈을 쓴 과거의 나에게 고마워 하고 있다. 안 그랬으면 지금 남은 만큼도 기억이 안 나고 있을 테니까.
2020년 3월 10일, 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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