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 찬미> (3회차)
* 다른 극에서 본 적 있는 배우님은 뒤에 ‘*’ 표시를 했습니다.
2019년 9월 20일 20시, TOM 1관.
김우진: 정동화. *
윤심덕: 최수진.
사내: 정민. *
‘사의 찬미’ 의 원곡인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 을 찾아서 들어 보았다. 그 결과 실제 인물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 에서는 쓰이지 않은 부분들도 곳곳에 쓰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의 넘버들이 실제 작곡가의 작품 (특히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을 인용한 것 만큼이나 많이 썼다. 다른 점이라면 이 극의 넘버들은 원곡과 분위기가 정말 많이 다르기 때문에 연주곡 버전이 나온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점 정도다.
이 날의 윤심덕은 정말 누구라도 좋아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특히 1921년의 그가 그랬다. 정말 햇살처럼 밝고 활발한 사람이었으며 그야말로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1926년의 그가 더더욱 안타까웠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 대사로 대략 나오기도 하고 예상도 되는데 좀 더 생각을 해 보게 만드는 그런 차이였다. 그리고 결론은 ‘이 세상과 시대의 통념이 윤심덕에게 정말 많은 죄를 지었다’ 정도였다.
사내가 어지간한 때는 거의 모자를 쓰고 있는데 (적어도 이 배우님의 사내는 그렇다) 이것도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느낌을 아주 강하게 주는 부분이라고 느꼈다. 적어도 한 개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솔직한 의견인데 나는 김우진이 한명운의 얼굴을 기억하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윤심덕은 어땠을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그가 분명히 자기 주변에 있을 거라는 감만이 남은 채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관부연락선에서는 아예 누가 걸어 들어오는 소리만 들려도 만년필 촉부터 들이대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것이 정의 내릴 수 없을 정도로 뭉뚱그려진 - 즉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주는 두려움인 것 같다.
그래서 그가 김우진과 윤심덕을 따로 만날 때는 아예 다른 성격을 띠는 어떤 것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모습이야 ‘도쿄 찬가’ 넘버에서의 장면 때문에 고정을 했다고 치더라도 친근하게 대할 때든 (‘사내의 제안’ 과 ‘난 그런 사랑을 원해’) 몰아 붙일 때든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야’ 와 ‘완벽한 결말’) 아예 다른 방법을 썼으니까. 말 그대로 분위기를 묵직하게 누르는 시대적 압박인 셈이다. <벙커 트릴로지> 의 모르가나가 전쟁의 광기였고 <미드나잇> 의 비지터가 자유를 빼앗긴 시대 또는 그 시대의 죄였던 것처럼.
- 이 날은 1921년의 김우진과 윤심덕이 정말 사이가 좋았다. 귀엽다는 생각 마저 들었다.